9월11일 참사

임영혁
 

 2001년 9월11일 우리는 뉴욕 맨해튼의 월드트레이드센타(쌍둥이 빌딩)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빌딩과 여객기 4대가 악마 같은 테러집단에 의해 격파되는 참사를 넋을 잃고 목격하였다. 지금까지 집계된 사망자는 여객기 4대의 탑승자 266명; 구조차 뛰어든 소방관 200명; 경찰관 78명; 펜타곤 200여명; 그리고 애매한 시민 3,500 여명이다. 나는 수 없는 비참한 뉴스가 계속되는 TV보도를 보면서 청천벽력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그리고 친척, 친구와 동녀를 잃고 애통해하는 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메어지고 또 흐르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우리는 이러한 참사를 보면서 국가와 이웃, 가족들과 친구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이며 그들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행복과 풍요를 누리고 있는지 그들에 대한 사랑의 귀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우리의 것인 양 착각하고 있는 우리의 목숨은 정말로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과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다시금 느끼게된다. 이 땅에서 주어진 우리의 생명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야 하며 우리의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선을 추구하고 정의를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이번 참사가  <우리들의 삶과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다시 한번 정립해보는 중요한 기회라고 믿는다.

 "<사랑이 충만하시고, 지극히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하시는가?!" 치솟는 나의 격한 마음은 그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자는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원망하느냐?! 고 하지만 나는 우리의 하나님은 자기를 원망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이러한 참사를 보고 같이 우시고 계시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내 쫓으실 때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철부지 아기가 무엇을 달라고 무턱대고 떼를 쓰면  들어주는 아기와 부모의 관계>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고 애쓸 줄 아는 성숙한 인간과의 관계>로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인간 안에 마귀의 간악함이 있음을 늘 경고하신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것은 이 간악함을 이겨나가는 우리를 보실 때라고 믿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드는 수 없는 자원 봉사자들; 다섯 시간 씩 기다려가며 헌혈을 하여 하루만에 전체 필요한 혈액 량을 넘게 만든 일반시민들의 정성; 몇 시간만에 필요한 양이 충족되었으니 더 이상 필요 없다 고 반복할 정도로 쏟아져 들어온 구호물품들; 인근 상점들의 "구조에 필요한 물품들을 얼마든지 제공하겠다"는 팻말들; 집집마다 내건 성조기와 가슴마다 단 작은 애도의 리본들; 기도와 애도의 날인 14일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십 수백 명이 모여 촛불을 밝히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모습들 - 이를 보면서 나는 격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고, 이들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역사 하심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전날 다니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해서 이번 참사를 면한 한 여직원이 "왜 나만 살렸냐"고 울면서 TV에서 호소하는 것을 보았다. 또 한 회사의 최고 경영인이 첫 개학날 아이를 학교에 데리고 가느라 늦게 출근하는 바람에 전직원이 참사를 당했는데 자기 혼자 살아 남았다고 울면서 망연 자실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수 없이 많다. 국방성 건물파괴참사 피해자로 처음엔 190명을 발표했다가 그후에 188명으로 고치었는데 그것은 2명이 출장을 가고 그 건물에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2명중 한 사람은 월드트레이드참사의 비행기에, 또 다른 사람은 펜타곤참사의 비행기에 타고있어서 결국은 사망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처럼 비참한 운명의 장난 같은, 기가 막힌다는 말 이외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을 <하나님의 예정된 역사>로 풀이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어떠한 보다 높은 차원의 목적 때문에 하나님이 피해자들의 일부를 모아 4대의 비행기에 태우고 또 더 많은 피해자들을 월드트레이드센타 빌딩에 모아놓고 이런 일을 당하게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비약이 클뿐더러 간악한 우리 인간들의 잘못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책임전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인간에겐 잘하고 잘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다 예정된 하나님의 탓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또 테러범들의 인적상황이 밝혀지면서 미국의 지성인들간에서는 "어떻게 한 두 사람도 아니고 20명에 가까운, 그것도 철없는 청소년들도 아니고 대학원교육까지 받은 사람을 포함한 나이든 청년들이 이런 일들을 저질을 수 있을까? 그들이 미국을 그토록 미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토론이 시작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혼자 남은 최강국이며 잘 사는 미국에 대한 시기심이 부른 재앙이라고도 한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전자게시판 등에 오르는 "혼자 잘먹고 잘산다고 뽐내고 있는 미국에 본때를 보여준 잘된 일이다" 라는 글들도 이러한 맥락이라 하겠다. 그러나 나는 시기심 때문이라는 간단한 대답보다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본다.

  미국이 이번 테러의 주동자로 오사마 빈 라딘(44)을 지명하고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최대의 건설회사를 갖고있던 갑부 무하마드 빈 라딘의 10번째 부인에게서 17번째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는 젊어서는 자기 아버지의 빈 라딘 건설회사에서 건설용 암반폭파 담당 등으로 일했으며 그 뒤 유산으로 3억 달러에 가까운 재산을 받은 후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수 천명의 아랍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서 이슬람을 수호하겠다는 반군활동을 함으로서 아랍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자신의 직할 테러조직인 알-카에다를 만들어 세계 34국에서 3천 여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광범위하게 테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슬람근본주의자(Islamic fundamentalist) 인 그는 이교도인 유대인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을 타격의 초점으로 삼고있다. 그는 지하드(聖戰-신의 섭리를 전파하기 위한 헌신)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테러활동을 미화시키고 있으며 98년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에 대한 폭탄차량 테러에 이어 지난해 예멘 항에 정박중인 미국군함 콜 호에 폭탄공격을 강행함으로서 미국정부가 500만 달러 현상금을 붙인 테러범이다. 빈 라딘은 10억의 인구가 되는 이슬람이 하나로 뭉치면 커다란 세력집단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자기가 만들어 조절하려고 치밀히 계획하고 추진하여 오고 있다. 그는 미국이 이슬람을 망치고 있는 이유로 <개방된 성문화로 사회도덕을 타락시키고 있다> <자유 경제의 돈이 부패를 가져오고 있다> <여성의 남성과의 동등권 주장이 사회질서를 파괴하고있다>고 주장하며 유일한 최강국인 미국과 대결하면 반사적으로 이슬람이 뭉치게된다고 계산하고있다. 겉으로는 걸프전 이후 신성한 이슬람의 성도 멕카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외국인인 미국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것을 트집 잡으며. 미국과의 테러전쟁을 지하드로 미화시키고 있다.

 이번 테러집단의 지침서(manual)가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들 테러집단이 자신들의 목숨을 받쳐 가며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든 그들의 구심점이 종교이었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 지침서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 목욕을 하고 향료를 바르고 심신을 깨끗이 하라는 것으로 시작되어 택시를 타기 전에도 또 비행장에 도착해서도 항상 기도하라고 <하나님>과 <기도>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들이 죽는 것은 하늘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테러 이틀 전에는 나체쇼를 보게 했는데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여인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유혹도 포함되어 있다. 죄 없는 승객들이나 지상에 있는 수많은 생명들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복수심을 갖고 하면 안 된다> 라고 하면서도 그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신의 하시는 일>이라는 표현으로 간단히 책임을 신에게 전가하게 하도록 한다. (이는 앞에 말한 <신의 예정론자들>의 책임전가와 버금하지 안는가?!).

 그들이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이유는 또 하나있다. 그들은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은 모두 <믿지 않는 자 (infidel)>로 표현한다. 사실 이 말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가 서로를 부르던 말이었으나 이제는 이슬람이 자기종교를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을 이렇게 부른다. 문제는 <믿지 않는 자>들의 생명을 자기들의 생명처럼 중요 시 하지 않고 비하시키는데 있다. 사실 200 여 년 전  미국에서도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안 들의 땅을 빼앗고 집단으로 학살 할 때도 <믿지 않는 인디안>이란 비슷한 논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항상 <나의 종교만이>의 독선을 조심하여야한다.  

 미국에 대한 증오로 꽉 차 있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 빈 라딘은 테러를 통하여 애매한 선량한 시민들만 희생시키는 지난 세기의 히틀러와 같은 마귀일 뿐이다. 이슬람교의 진정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랑과 타협으로 그의 이슬람을 지킬 수는 없을까? 마귀 같은 증오심만은 결국 많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올뿐더러 또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고 갈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은 성조기의 물결로 덮여 있고, 라디오와 TV에서는 미국 국가와 'God bless America' 노래가 끈 치지 않고 흘러 나오고있으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있는 대통령은 테러범들의 응징이 "21세기의 첫 전쟁" 이라고 다짐하고있다. 이 세상에는 분명히 마귀의 장난에 의한 악이 존재한다. 우리는 선을 지켜야 할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를 위하여 악과 싸워야 한다. 무고한 수천의 생명을 빼앗아간 테러범들과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후원국들을 찾아서 강력한 벌을 주어 차후에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  나지 않도록 본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응징이다. 그러나 복수심에 불타서 무차별 보복을 한다면 죄 없는 민간인들의 희생이 발생 할 수 있고 이는 역설적으로 또 다른 형태의 테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복수다. 우리는 테러가 테러를 낳는 계속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테러의 연속을 보아왔다. 그럼으로 죄 없는 애매한 그들의 시민들에게까지 피해 주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 하여야 한다. 테러에 무참히 희생된 미국시민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테러범들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그 나라의 무고한 시민의 목숨도 중요하다.  자칫하다간 미국 역시 테러범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전쟁에 시달려온 아프가니스탄의 애꿎은 국민들, 특히  그들의 부녀자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냉철하여야 하고 <응징>과 <복수>를 구별하여야한다.

 이번 참사로 복수의 분노를 참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이곳에서 살고있는 애꿎은 아랍계 이민자 들이 엉뚱한 보복을 당하는 일이 있다. 그들은 미국에 갓 이민을 왔든 몇 대가 살았든 간에 아랍 계라는 명분한가지로 보복을 당하고 있다. 어린 두 아이를 가진 어느 아랍계 엄마가 자기는 자기의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3대째가 살고있는데 이번 테러 사건으로 놀이터에서 놀고있는 자기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이 밀어 제쳐서 이제는 아이들이 나가서 놀지도 못하게 되었으며 집에 창문을 열어 놓으면 돌이라도 던질 것 같아 창문까지 닫아야 한다면서 "얼마나 이 나라에 더 살아야 완전한 시민이 되는 거냐?" 고 울먹이며 말하는 것을 TV를 통해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응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테러범들과 같게 보이는 외모 때문에 억울하게 보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절대로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이민자의 입장에서는 특히 그러한 보복은 적극 막아야 한다.

 전세계를 경악과 분노로 가득 차게 만든 이러한 끔찍한 테러사건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인간 안의 마귀의 간악함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있다. 지난 몇 주 일 동안 미국이 똘똘 뭉쳐 하나가되어 함께 슬퍼하고, 도와주고, 참고, 이해하고,  받아드리며 이 참사를 이겨 나가는 이러한 미국의 새로운 정신(new spirit)은 바로 이 하나님의 선물, 즉 섭리와 말씀을 느끼고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이번 참사에 희생된 선량한 국민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무조건 순종하라>는 종교지도자나 정치지도자의 요구를 우리가 생각과 판단 없이 따르면 우리도 테러리스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며 우리의 하나님은 성숙한 우리의 판단을 기대 하신다는 것을 다짐하며 살아야 하겠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종교와 그를 믿는 이들의 생명도 우리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며 <나의 종교만이>의 독선을 조심 하여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바로 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퍼온글: 보스톤 한인교회발간 "필그림", 2001)

 

 


교차로: 과학과 종교

조요윤

  필자는 종교학자도 순수과학자도 아니다. 그러나 생업을 응용과학인 공학에 종사하며, 어려서부터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지내었으며 또 IRAS (Institute on Religion in an Age of Science)등의 회원으로 있음으로 이에 관한 기사를 부탁 받았을 때 나름대로의 생각을 독자와 나눌 수 있으리라 믿고 이를 쾌히 수락하였다. 그러나 본 주제는 독자에 따라 워낙 개인적으로 거부감을 갖게 할 수도 있는 사항들임으로 혹 독자 중에 불쾌함을 갖게 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를 서두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자한다.

  필자는 인간과의 관계를 떼어놓은 종교나 과학은 무의미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종교와 종교단체 및 종교인, 과학과 과학인 및 과학단체의 구별을 두지 않고 <종교> <과학> 이라는 두 단어로 이들을 총체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칭하는 단순 표현을 이용하였다.

종교의 독선과 횡포

  우리는 종교가 인류에게 평화와 자유와 옳게 사는 참 삶을 가르치며 유린당하며 핍박당하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온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서구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조직화해가면서 급기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광범위하게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세력을 갖게 되었으며 그렇게 되자 성경을 떠나서 인위적인 엉터리 법을 만들어 그것이 신의 뜻이라 하며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였으니, 몇 가지 예를 들면 면죄부를 팔아 교회는 막대한 돈을 모았고, 한 나라의 국왕이 되려면 교회에 뇌물을 바쳐서 교황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가 하면, 처녀가 시집을 가려면 결혼 전날을 승려와 자야 심신이 깨끗해진다며 집단 강간을 자행하기까지 하였다. 이들은 또 철학자들의 생각을 막았고 과학자들의 새로운 이론을 허용하려들지 않았으니 독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지동설을 이야기하다 죽을 뻔한 Galileo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모든 것은 신을 빙자해서 자신들이 누리고있는 세력의 기반을 흔드는 이론을 허용하지 않으려 함이었다. 이것이 훗날 "암흑시대"라 불리 우는 암담했든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가 아는 한국의 역사에서도 명승들을 국사나 왕사로 왕실에서 모시고 또 대개의 왕들이 보살계를 받아야하던 고려시대에 불교와 그 승려들이 판을 치든 횡포 상황이 이와 버금 한다 하겠다.

   "나의 종교만이"라는 독선은 드디어 십자군을 조직하여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는가하면, 모하메드교는 칼을 들고 선교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간의 전쟁은 인류에게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전쟁이 끊어질 때가 없는 계속되는 전쟁의 역사를 가져왔다. "유태교와 기독교 (Judeo-Christian)"를 기반으로 했다는 서구사회의 기독교회는 부활절이 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유태인이다!!" 라며 유태인에 대한 증오심을 매번 가르쳐 오더니, 드디어 기독교인들인 독일인들이, 한편으로는 성탄절이면 온 인류의 사랑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찬송하면서도, 동시에 5백만 명의 유태인을 독가스로 죽이는 참혹한 Holocaust의 만행을 저지르게 하였다.     

   지금도 에이즈로 죽어 가는 환자가 가장 많은 나라중 하나인 Uganda 에서 "피임은 교회의 가르침에 위반된다"고 주장하며 반대하는 교회 때문에 condom의 배포를 못하고있으니, 그 교회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에이즈에 감염시켜 죽여 가고있는가? - 이것이 지금도 버러지고 있는 <종교의 독선과 횡포>라 하겠다.

 과학의 교만과 횡포

   문예부흥(Renaissance)을 계기로 시작된 과학의 재기는 20세기에 극치를 이른 것 같다. 의약의 발전은 흑사병, 폐결핵 등의 무서운 전염병과 병마에서 인류를 구하고, 나아진 식량 생산과 운송 시설은 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안전한 주거 시설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이 또한 과학무기로써 살상의 수단으로도 쓰이게 되었으니 인류역사상 가장 과학이 발전한 20세기에 들어와서 독가스나 원자탄 같은 가공할만한 과학무기들이 나타나고 또 세계 1, 2차 대전과 이어서 한국전쟁과 월남전쟁 등 그리고 그보다는 규모가 적은 전쟁이 수없이 계속되면서 그전까지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었든 수많은 살 상자와 피해자를 만들어서 지구촌 인류를 항상 전쟁의 공포에 떨게 하고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그 잔재는 계속되니 중국에서는 구 일본군이 묻어버리고 간 화학무기가 50년이 지난 지금 흘러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고 있고 한국, 캄보디아 등에서는 대인지뢰로 발목을 잃고 일생을 불구자로 살아야만 하는 불행한 사태가 지금도 수 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과학의 교만은 극치에 달하면서 20세기를 마치었다. 2000년 출간된 The Virtue of Prosperity의 저자 D'Souza는 Silicon Valley에 닷컴<.com>으로 매년  백만장자들이 (이들은 백만장자의 정의를 자산이 백만 불이 아니라, 일년에 백만 불을 버는 사람들로 바꾸었다) 수만 명씩 생겨난 것은 그 규모가 인류역사상 전무한 사실이었다고 기술한다. 그런데 이들이 인류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물론 필자도 internet과 e-mail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그 편리함을 높이 인정한다. 그러나 PC를 가지고있는 사람은 이 지구촌에서 불과 1%에 해당한다고 한다. 나머지 99%는, 특히 아프리카나 북한 등에서는, 아직도 먹을 것이 부족하여 굶주리고 있는데 그 1% 인구의 장난감제조사업이 새로운 사업자금을 거의 독식하며 (2000년에만 벤처 투자액이 1,040억불), 그렇게나 많은 부를 몰아가면서 20세기를 마치었다.

  교만해진 과학은 종교를 그냥 두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17세기 파스칼의 이야기를 보아도 당시의 과학자들도 종교인들을 미치광이와 비교하는 풍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과학자들의 종교 비하가 노골적으로 나타났으니 종교인들을 "어른이 되어서도 <크리스마스 동화를 믿는 아이들> 처럼 어리석은 사람들"로 부르기까지 한다.  Nature지(1998년 7월호)에 의하면 미국의 최고 과학자들의 모임으로 일컫는 National Academy of Science (NAS, 미국 국립 과학 한림원)의 과학자 가운데 오직 7%만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런데 NAS는 국가에 자문하고 특히 장래의 교육 방향 등에 큰 영향을 주는 미국 최고의 과학자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미국의 젊은이들을 종교에서 떼어놓으려고 하고있다. Dream of a Final Theory의 저자 노벨 물리학자 Steven Weinberg는 "인간은 우주만물의 중요한 원리(혹자가 신의 비밀이라는)는 중요한 것은 이제 모두 알 것은 알아내거나 알게되었다"고 선언한다. 과학의 교만이 극치에 왔다.

 교차로가 보이는가?

   나는 이 글의 제목을 <교차로>라 했다. 수 백년을 서로를 비난하며, 모함해오면서 평행선만 달려온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바라서 그 만남,  그 교차로가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마음에서 <교차로>라 했다. 그러면 그 교차로가 보이는가?

  17세기 Blaise Pascal을 통하여 우리는 그러한 교차로를 잠시나마 보았다. 당대에 가장 뛰어났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그는 과학저서 이외에 Apology of the Christian Religion, Pensees(팡세: 명상록)의 저자이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소수이지만 급격한 과학의 발전과 교만을 우려하는 과학자들과 종교의 독선을 우려하는 종교인들이 그 두 평행선을 조금씩 굽혀 만남을 이루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그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아마  John Templeton Foundation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이러한 종교와 과학이 동참하는 프로젝트에 일년에 약 4천만 불을 쓰고있으며 특히 1973년에는 Nobel상에 종교에 대한 상이 없는 것을 대신해서 Templeton상을 만들어서 매년 수여하여온다. 상금은 항상  Nobel상 보다 조금 많게 정해져있다. 첫 번째 Templeton상의 수상자는 Mother Teresa이었으니 이는 Mother Teresa가 Nobel 평화상을 받기 6년 전이었다. 수상자는 종교인에 국한 되어있지 않았으며 1983년에는 Aleksandr Solzhenitsyn, 작년에는 물리학자 Freeman Dyson이 받았다. Billy Graham목사와 한국의 함경직목사도 수상자였다. 금년도 수상자는 영국 Oxford대의 Arthur Peacoke박사로 그는 DNA의 연구로 유명한 물리생물학박사이며 또 신학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안수 받은 과학자 협회(Society of Ordained Scientists)"의 창립자이다. 그를 <과학 속의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소개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Templeton Foundation이외에도 몇몇의 조직이 있으며 그 하나는 Institute on Religion in an Age of Science (IRAS)로 종교학자, 과학자 사회학자들의 모임으로 매년 주제를 정해 여름이면 뉴햄프셔의 스타아일랜드에서 학회를 연다.

  나는 Templeton Foundation의 하는 일을 보면서 또 IRAS의 학자들을 보면서 과학과 종교의 <교차로>를 보게 되곤 한다.

 교차로를 떠날 때

   그런데 과학과 종교의 교차로에 도달하게된다면 어떻게 될까? 두 길이 교차로에서 만나면 자칫하면 다시 헤어져서 따로 따로 제 갈 길을 가게되기가 쉽다. 우리는 이것을 막아야한다. 평행선이었던 두 길이 합치어져서 커다란 한길로 가게 만들어야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과 종교는 자신의 영역과 분수(?)를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과정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학문이다: 가령 과학은 한 인간이 어떻게 (How) 태어났는지: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어 잉태되어 ... 등등을 설명 할 수 있지만 그가 "왜? (Why?) 무슨 목적으로 세상에 태어났는지는 설명하려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몫이기 때문이다.

  성경학자들의 꽤 좋은 평을 받고있는 "Asimov's Guide to the Bible" 의 저자인 생물학자이며 200여권의 과학소설을 펴낸 Isaac Asimov는 "종교는 나의 상상력을 구속함으로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나를 닮으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고 했다. 나는 그가 앞서 이야기한 NAS의 학자들보다 남을 배려 할 줄 아는 훨씬 성숙한 학자라고  생각한다.

  종교 역시 과정 또는 "How"에 관한 설명을 하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과학의 몫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Arthur Peacocke가 지적했듯이 과거 종교의 잘못은 "자체 절대화 (self authentication)"의 독선이었다. 다 알지도 못하면서 절대자의 이름을 빌려 다 아는 것처럼 굴다가 위선을 저지르곤 했든 과거의 방식은 버려 야만 한다. 교황이 십자군전쟁의 잘못을 시인하고,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 "과학사랑 나라사랑"의 상임대표를  맡으며 과학과 종교는 같은 것을 두 개의 틀린 창문으로 볼뿐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과학과 종교가 자체의 한계를 이해할 때 서로에게서 보완 받으며 한길을 같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 벌어지는 21세기는 참으로 엄청난 과학의 발전이 엿 보인다. Quantum computer나 특별히 새로운 약품의 개발은 이미 예상된다. 그런데 지난 세기의 인류역사를 보면 자칫 하다간 이 엄청난 과학의 발전이 가공할만한 과학무기나 또 인위적인 인간복제 사고 등의 무서운 기술로 인간을 찾아올 수도 있다. 인간은 유신론자나 무신론자를 떠나서 그 속에  <옳고-그름>을 인지하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그 능력을 깨 닳게 하고 키우고 실천하게 하는 것이 종교다. 이 21세기에 나타날 엄청난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무서운 기술이 아니라 참된 도움이 되는 이기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종교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 과학과 종교가 조화되어 한길로 같이 가는 것이 우리가 기원하는 21세기의 참 모습이라 하겠다.

  끝으로 과학과 종교에 관해서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하여 다음의 web site와 책들을 소계하며 이 글을 마친다:

www.iras.com - Institute on Religion in an Age of Science

www.templeton.org - John Templeton Foundation

Arthur Peacocke저 Theology for a Scientific Age, Fortress Press, 1993

Mark Worthing저 God, Creation, and Contemporary Physics, Fortress Press, 1995

Freeman Dyson저 Imagined World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Ian Barbour저 When Science Meets Religion, Harper, 2000

John Polkinghorne편집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s of God, Trinity Press Int., 2000

Stannard편집 God for the 21st Century, Templeton Foundation Press, 2000

(퍼온글: 보스톤 한인교회발간 "필그림",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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